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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스.V.라인헤르츠 x 타카바야시 미야비

혈계전선 

타셰

그 해의 여름은 지옥이었다.

 

어디고 구분 없이 전 세계가 지옥이었다. 흡사 종교에서 외치는 운명의 날, 심판의 날, 그런 것들을 눈앞에서 목도했을 때의 충격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 모든 일은 대체 언제 어디서 어떠한 연유로 시작된 것일까. 의문이 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작은 머리와 좁은 시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그 상황을 파악하기는커녕, 살아남는 것조차 불가능에 가까운, 힘없고 나약한 여자일 뿐이었으므로.

 

내가 준비가 되었거나 말거나 아는 체도 않고, 죽음은 어느새 내 주위를 온통 잠식하고 있었다. 상황을 깨달은 첫 날, 나는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를 마주보고 살갑게 웃던 사람의 눈에 핏발이 서다 못해 터져서 볼을 타고 질질 흘러내리는 것을 보았다. 왼쪽 볼의 피부는 뜯어져 나가고, 드러난 하얀 이빨 사이로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상황 판단 따위가 가능했을 리 없다. 더 이상 '그 사람'이라고 부를 수 없게 된 '그것'이 성대를 찢으며 내지르는 것 같은 쉰 소리를 높였을 때 내 몸은 이미 반사적으로 달리고 있었다.

 

세상은 태어나 처음 보는 쨍한 붉은색으로 가득했다. 나는 피어나는 꽃의 붉은색도 좋아했고 타오르는 태양의 붉은색도 좋아했지만, 이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혐오스러울 정도로 눈이 시린 피의 색은 결코 반갑지 않았다. 나는 살 곳을 찾아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렸다. 익숙한 동네의 익숙하지 않은 광경을 눈으로 좇으며, 극도로 예민해진 생존 본능에 따라 발을 움직였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이질적인 붉은색을 찾아낼 수 있었다. 기분 나쁜 색의 피를 뒤집어쓰고서도 덥수룩한 붉은 머리카락 아래의 녹색 눈동자를 맑게 빛내던 사람.

 

나는 구원받았다. 감히 단어를 선택하자면 나는 구원받았다. 그 때의 일을 떠올리면, 그 기적과도 같은 일련의 사건은 감히 구원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

 

아무것도 신지 않은 발바닥이 무언가에 긁힌 것 같이 따갑다. 이 모든 것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나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다만 내가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한밤중에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고, 어디선가 「그들」이 나타났으며, 「그들」의 무리 속에는 나의 친동생—혹은 그와 비슷하게 생긴 어떠한 존재—이 끼어 있었고, 집이 있는 방향에서 나타난 「그들」을 피해 반대 방향으로 도망치다보니 이 모양 이 꼴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달릴 수도 없다. 힘이 빠져서, 나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아파트 건물로 들어가 숨었다. 밖이 소란스러웠다. 무언가가 터지는 듯한 폭발음과 사람들의 비명소리. 유리가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 절망과 혼돈의 소리가 이 세계를 가득 채우고 있다. 다리를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차라리 여기서 포기하고 죽어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이런 상황이 되면 어떻게 하겠다던가,반 즈음 장난으로 생각해오던 것들은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린다. 단지 겁에 질려서 온 몸을 웅크리고 떠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이 건물이 안전한지도 모르는데 더 이상 다리에 힘도 들어가지 않는다. 눈물도 화도 나지 않고 다만 잠이 몰려든다. 여기까지 도망쳐올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었지만 이 이상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어차피 나 혼자 살아남는 것도 불가능할 테니까, 이대로 자자. 마침 피곤하잖아. 깊게 잠들어서 눈을 뜨지 않으면, 나는, 분명──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높은 괴성이 울렸다. 가라앉은 공기를 강제로 길게 찢어버리는 것만 같은. 알고 있다. 「그것」의 울음소리다. 이미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그것」은 아주 가까이에 있다. 아직 나를 눈치 채지는 못한 것 같지만 분명 고개만 내밀면 「그것」은 나를 볼 것이다. 키이익, 하고 우는 소리에 이어서 딱, 딱, 이를 맞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불현듯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생각이 있어 주머니에서 손거울을 꺼냈다. 아파트 입구는 유리문이니까, 거울로 「그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떨리는 손으로 유리에 손거울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보았다. 거울에 비친 것은, 몸의 관절을 기괴한 각도로 꺾고, 보통 인간이었다면 죽었어야할 상처를 옆구리에 입고, 찢긴 상처 틈새로 붉은 핏덩어리를 매단 채, 그럼에도 인간의 형체를 하고 있는 「괴물」이었다. 본능적으로 숨을 참았다.

 

한 걸음씩, 아주 조금씩, 그것은 내가 있는 곳으로 가까이 온다. 위층으로 도망치고 싶지만 소리를 낼까 두렵다. 몸이 벽과 바닥에 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몸을 최대한 웅크리고, 손에 든 손거울만을 노려보면서, 그렇게 한참을 숨죽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마침내 유리문의 앞까지 왔을 때, 동시에 내 숨이 이제는 한계에 다다랐을 때, 무언가 「빛나는 커다란 것」이 「괴물」의 머리를 정확하게 가격했다. 그 일련의 살생 과정은 지나치게 매끄러웠고 또 딱 그만큼 조용했다. 「괴물」이 고통에 울부짖을 틈도 주지 않고 정확히 그 목숨을 끊어버린 것이다.

 

이건 또 다른 행운인 걸까? 나는 뒤늦게 찾아드는 떨림을 참아내며 생각했다. 그러니까, 영화에 자주 나오는 그런 거다. 어떤 숙련된 군인 같은 사람이라도 있어서 지나가는 길에 저 괴물을 보았고, 그래서 딱히 나를 구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단순히 제거의 의미로 죽여 버렸을 뿐인 거다. 하지만 피가 뿜어져 나오고, 인간의 신체 구조를 가진 존재가 죽는 것은 태어나 처음 보는 일이어서, 생각은 거기까지밖에 할 수 없었다. 두려움에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만 같은 이성을 유지하는 것은 여기서 죽고 싶지 않다는 생존본능이었다.

문득, 누군가 유리창을 두드린다. 똑똑, 하는 소리에 퍼뜩 고개를 드니 큰 키에 체구가 좋은 남자가 서있었다. 「그것」이, 그러니까, 이제는 인정하겠는데, 좀비가 움직임을 멈추는 과정에서 터뜨린 피와는 전혀 다른 붉은색의 머리카락을 덥수룩하게 기르고, 상황에 맞지 않는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가 서있었다. 눈이 마주치고 나는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파트의 유리문을 열고 그를 마주하자, 그는 내게로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다친 데는 없나?”

“……네? 아, 네.”

“다행이군.”

 

다친 데는 없냐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내 어깨 위로 자신의 겉옷을 걸쳐준다. 떨고 있는 것이 안쓰러워 보이기라도 했던 걸까. 그러나 괜찮다고 사양하기에는 그 겉옷이 따뜻해서,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전해주어서, 공포로 후들거리던 것이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린다. 나는 안도하고, 심호흡을 했다. 그러는 사이 그는 어딘가에 전화를 걸고 있었다.

 

“아, 스티븐. 생존자가 있었네. 그 쪽으로 데려가지.”

 

몇 마디인가를 더 하고 나를 돌아본 그는 빙그레 웃었다. 하루 만에 마주한 누군가의 웃음에 나는, 너무도 쉽게 안심하고 말았다.

 

***

 

“고생이 많군, 미야비.”

“아, 클라우스! 바쁜데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요?”

 

빈 도시를 이리저리 떠돌며 모아온 생필품들은 어느새 창고를 거의 메울 만큼 쌓여 있었다. 낡은 종이에 적당히 갈겨 쓴 내용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펜을 닫는데 문득 창고의 문이 열리더니, 쏟아지는 빛을 뒤로하여 커다란 실루엣이 나타난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날, 클라우스는 자신과 동료들이 좀비들을 몰아내고 확보한 건물로 나를 데려왔고, 며칠 쉬고 난 나는 그들의 일손을 돕게 되었다. 그러나 싸움은커녕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둔하기 짝이 없는 내가 할 일은 그들이 마구잡이로 모아온 물건들을 분류하고, 그리고 놀랍게도, 미래에 물려줄 만한 책이며 종이로 된 자료들을 보관하는 일이었다. 중요한 문서나 작품들이 있다면 이 방에 따로 보관해주게, 하며 책꽂이 비슷한 것들이 가득한 방을 내게 보여주던 클라우스의 눈은 미래를 향한 확신으로 가득 차있어서,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생존자를 더 많이 받아들이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의료적 처치를 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고, 마침내 바깥에 남아있는 고립된 생존자들에게 가까운 지역이나마 구호품을 전달할 수 있을 만큼, 우리는 발전했다. 가까스로 살아남는 것 그 이상을 바라고 모여든 몇 사람뿐이었던 건물 안에는 이제 스무 명이 넘는 사람들이 제 일을 하며 살아가게 되었고, 그 가장 앞에는, 언제나처럼 녹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이 모든 것들을 가능하다 믿었던 클라우스가 있었다. 그는 나의 목숨을 구했고,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했으며,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고 있다.

 

“자네가 보고 싶어서.”

 

그리고……, 그런 사람이 공공연하게 내 연인이라는 건 조금 부끄러워지는 이야기지만, 그래도 어쩌겠는가. 인류가 기울어가는 것이 분명한 이 상황에서도 젊은 남녀는 사랑을 한다. 축복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기도 한다.

 

“여기 있는 거 알면 스티븐한테 혼나지 않나?”

“할 일은 마치고 왔으니까 괜찮을 걸세.”

“으응, 그러면 뭐, 자! 두 시간 만에 안아 봐요, 우리.”

 

팔을 활짝 벌렸다. 그는 내게로 한 걸음 다가오더니, 커다란 품 안에 나를 가득 끌어안았다. 나는 거의 그에게 파묻힌 상태로, 그의 넓은 가슴을 간신히 끌어안았다. 건조하고 투박한 냄새가 온 몸에 가득 차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매끄러운 옷의 질감을 몇 번 만지작거리고 나서 몸이 떨어진다.

 

“오늘 나갔던 팀이 뭘 가져왔을지 맞춰보게.”

“어, 뭔가 굉장한 걸 가져왔나?”

“뭘 것 같나?”

“음, 으음……, 글쎄요? 무기는 아닐 것 같고.”

“좋은 와인과 맥주.”

“헐.”

“술은 마실 줄 알겠지.”

 

그럼요, 당연히요! 자리를 쿵 내리치며 내가 외치듯 내뱉은 대답에 클라우스는 웃었다. 거의이 년 만에 마셔보는 술이다. 잘 마시지는 못하지만, 그 말을 들은 것만으로 오후에 더 힘을 내서 일 할 힘이 났다.

 

“그러면, 이따가 저녁 자리에서 보지.”

“응! 조금만 더 힘내요, 내 사랑.”

 

이 상황에서도 사랑이 담긴 인사를 건넬 수 있다는 것. 이 건물 안에서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은 무기를 소지하고 있지만, 적어도 전처럼 무기를 품에 숨기고 있지는 않다는 것. 나는 이 모든 상황 속에서도 좋은 점을 조금씩 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클라우스의 덕이다. 이렇게 말하면 그는 겸손하게 부정하겠지만.

 

다시 창고 밖으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이 평소보다 조금 크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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