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티브 로저스x송 윤
MCU
마곳
사실 재화(災禍)란 누구에게나 닥쳐오는 것이지만, 그것이 우리 머리 위에 떨어졌을 때는 여간 해서 믿기 어려운 것이 된다.
(알베르 카뮈, 페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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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마는 갑자기 시작되었다. 모든 국가의 든든한 친구인 세계의 보이스카웃을 자처하던 거대한 북아메리카 대륙의 어느 외진 실험실,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실험을 저지르던 자들의 손끝이 묵시록을 재현해냈다고 했다. 비이커와 샬레의 주둥이 사이에서 흘러나온 연기는 묵시록의 네 기사를 부르는 종소리였다고도 했다. 인간은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다 주장하던 자들이 만들어낸 재앙이었다. 스스로가 다른 인간들을 옳은 방향으로 이끌 통치를 해야 한다고 믿었던 자들은 사도 요한이 보았다던 지옥경을 닮은 인세의 지옥을 펼치고 가장 먼저 목줄기에서 피를 뿜으며 죽었다고, 그렇게 말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들을 줄줄이 말하는 남자를 보며 윤은 어떻게 대답을 해야 이 말도 안 되는 삼류 판타지 같은 이야기를 뒤집어엎을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했다. 그러나 감염자들에게서 그녀를 구해주고 그녀에게 그 어떤 편집자도 써주지 않을 말도 안 되는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줄거리 같은 현실을 말해준 남자는 더없이 평온하고 흔들림이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꼭 루벤스의 그림에 나오는 인물처럼 곧고 길쭉한 선의, 젊은 금발의 미남자가 짓는 표정은 몇 십 년을 산 노인처럼 엄숙하고 진중해 그녀는 순간적으로 노교수의 엄중한 꾸짖음을 받는 신입생처럼 곧게 등을 세웠다.
거짓말 같겠지만 사실입니다.
묵직한 목소리가 부러뜨린 나뭇가지 위로 타오르는 불길에 눌어붙었다. 그녀는 몇 시간 전 그녀를 들쳐 업고 달린 주제에 지친 기색 하나 보이지 않는 남자를 한 번, 그리고 그녀의 무릎 위에 얌전하게 놓여있는 권총을 한 번 쳐다보았다. 눈물과 콧물 범벅이 되어 숨을 몰아 쉬던 그녀를 매정하게 차 안에 남겨두고 떠났던 남자는 돌아오자마자 그녀에게 총을 건넸다. 신속하고 절도 있게 총기를 다루는 동작은 다른 사람을 살피는 데 서툴다는 소리를 듣던 그녀도 알아챌 만큼 분명하게 그의 출신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녀는 저가 그에게, 군인이에요? 라고 물었을 때 희미한 긍정의 빛을 품던 남자의 눈을 기억하고 있었다. 정직하고 올곧은 눈이었다. 세상 모든 것이 그르다 할지라도 스스로 그것이 옳다고 느낀다면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단단하고 맑은 눈. 그녀는 입술을 질겅거렸다. 작은 실험실이 만들어 낸 미세한 묵시록이 온 세상을 뒤엎었다. 세상은 이제 산 자들의 살점을 뜯어먹는 감염자들과 그 감염자들을 피해 아등바등 살아가야 하는 살아있는 자들로 나뉘어졌다.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명석한 자와 어리석은 자, 약한 자와 강한 자 모두 죽음 앞에 평등하게 비참해졌다. 무릎 위의 소총의 무게가 그녀를 짓눌렀다.
그녀는 비틀어 깨물던 입술을 간신히 떼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곧고 단단한 시선이 그녀의 고개가 움직임에 따라 서서히 함께 올라와 떨리는 눈동자 안에서 뒤섞였다. 혀 끝으로 물음과 타액이 질척하게 뒤섞였다. 그녀는 제 목소리가 어떻게 들릴지도 생각하지 못하고 물음을 던졌다. 나를 왜 구했어요?
당신이라면 혼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을 텐데.
......
위험해질 뻔 했잖아요, 날 구하느라.
이 총도 그렇고. 그녀는 떨리는 어깨를 으쓱거리는 척 하며 감추려 들었다. 공포는 언제나 스스로를 얕보이게 만들었으므로. 애써 긁어 모은 냉정함과 그에 뒤따르는 얇은 가면을 뒤집어쓰자 뱃속에서 뭐라도 들끓는지 싸한 압박감이 내장을 졸라 쥐었다.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자는 손에 쥐고 있던 나무 가지를 부러뜨렸다. 탁, 딱딱한 것이 허리를 꺾는 소리가 고요한 밤공기를 긴장감 있게 뒤흔들었다. 달리고 구른 탓인지 몇 가닥 휘어져 내려온 그의 금발이 튀어 오르는 불길에 젖어 흰 테를 두른 주홍색으로 반짝였다.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남자는 주변을 긴 손가락으로 짚어 아주 얇은 나무 가지 하나를 또 다시 손에 쥐었다. 저 멀리서 개인지 늑대인지 모를 것이 아득하게 울부짖었다.
당신은.
무겁고, 그러면서도 울림이 좋은 목소리. 그녀보다 고작해야 몇 살 많아 보일 사내의 목소리 치고는 두껍고 피곤에 지친 목소리가 발치에 뭉그러졌다. 그녀는 느릿하게 눈동자를 들어올려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주 먼 곳을 떠도는 얼굴을 했다. 그리움과 고통이 뒤섞인 얼굴이 불어온 바람에 몸집을 키운 불길 속으로 삼켜지듯 흐려지다 뚜렷하게 밤하늘 아래 드러났다. 그녀의 눈가를 스친 시선은 낙인을 찍는 쇳덩이처럼 뜨겁고 무거웠다.
내가 찾고 있는 사람을 닮아서, 그저 두고 갈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요?
외모는, 그렇게 닮지 않았지만.
눈동자가 담고 있는 표정이, 닮아있었어요. 그는 그렇게 말하곤 다시 굳게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잠시 동안 멍하니 눈을 깜박이다 느릿하게 시선을 다시 무릎 위의 총으로 내렸다. 검고 반질거리는 쇳덩이는 한 번의 손길로 삶을 빼앗을 수 있다는 가벼움과는 달리 무겁고 찼다. 눈동자, 담고 있던 표정. 그녀는 제가 그를 향해 무슨 표정을 지었을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살아있지도 않은 것들에게 쫓겨, 눈물과 식은땀이 엉망으로 뒤섞이고 지저분해진 추한 얼굴이, 다급하게 치뜬 눈이 대체 무슨 표정을 담고 있었단 말인가? 고통? 그게 아니면 공포? 그러나 입을 다문 그는 더 이상 아무 것도 이야기 하지 않을 것처럼 굳은 얼굴로 손에 든 나무 가지를 불길 속으로 던져 넣었다. 그녀는 어릴 적 알지 못하는 것에 부딪쳤을 때 으레 그러했듯 다리를 모아 세워 그 위로 뺨을 묻었다. 무릎 위에 얹혀있던 권총이 골반 위로 덜걱 거리는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있죠. 세상에, 그녀는 심지어 그의 이름조차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에게 한 번 구해졌다. 실험실에서 행해진 묵시록의 나팔 소리로 뒤덮인 세상에선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터였다.
조금 안전한 곳을 찾으면, 총을 쏘는 법을 가르쳐줘요.
.....쏘는 법을 모릅니까?
전혀요.
그는 그녀를 바라보며 그렇군요, 하고 짤막하게 중얼거렸다. 한 번에 두 마디 이상은 하지 못하는 저주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그의 모든 언어가 손가락 끝에서 조각조각 끊어졌다. 찬 기운이 몰리는 바람이 등허리를 훑고 지나갔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오늘 밤은 둘 다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을 알았다. 당장 생존의 끝까지 휘말린 스스로의 이야기를 곱씹을 그녀 자신도, 그녀로 인해 갑작스레 바늘에 물려 나온 과거를 곱씹게 될 그도. 눈을 깜박이자 나직한 목소리가 연기에 섞여 귓바퀴 끝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제 이름은. 그녀는 고개를 아주 약간만 틀어, 무릎 사이에 얼굴을 반쯤 묻은 상태로 그를 바라보았다. 긴 황금의 속눈썹을 잠깐 동안 내리깔고 있던 그는 잠자코 혀 끝을 물었다가 다시 입술 사이를 비집었다.
스티브 로저스입니다.
이름 소개하는 타이밍이 조금 그렇네요.
세상이 망했다고 언제까지고 저기요, 같은 말로 부를 수는 없잖습니까.
그녀는 웃었다. 웃을 상황이 아닌데도 웃음이 나왔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찌 되었건 그들은 같이 다니게 될 것이고, 이름 정도야 부를 수 있는 관계가 되어 나쁠 것은 없었다. 무릎을 감싼 손으로 툭툭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박자를 맞추면서,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그렇네요. 남자, 스티브 로저스의 시선이 그녀의 귓불과 턱선을 훑고 그녀의 눈가 즈음으로 올라와 머물렀다. 나무 타는 냄새는 기이하게 향긋했다. 내 이름은. 그녀는 나직하게 우물거렸다.
윤이에요. 송 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