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가메쉬 X 니아
FATE 시리즈
-엘레니아
1.
새하얗고, 새하얀 세계.
창문 바깥으로 보이는 것은 그런 단색으로만 이루어진 세상이었다. 사내는 홍안을 깜박였지만, 태양이 작렬하던 제 고향에선 볼 수 없는 광경으로 이루어진 세상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사내는 그것이 기묘한 광경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래도록 침묵하며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덕분일까. 그 순백색은 지금 이 순간에도 흩날리는 함박눈으로 인해 야기된 것이라는 사실을, 사내는 곧 인지할 수 있었다. 또한 제 갑주를 파고드는 한기가 이질적일 만큼 냉혹하다는 것도.
“……저어.”
사내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낮은 지붕. 어딘가의 다락방 쯤으로 보이는 너저분한 공간에서 한 소녀가 저를 바라보며 의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긴 흑발. 고동빛 눈동자. 순진하고 무해한. 하지만 무심하다. 그리고 사내는 그 사실에 문득 제 심기가 불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처음 순간부터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그제서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 곳에는 이제껏 모든 마술사가 그러했듯, 응당 자신을 부를 때 보여주었던 경외가 없다. 우러름도 없고 존경조차도 존재하질 않았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겠지, 바다와 같은 아량으로 참아낸 누추한 공간을 차치하더라도 소녀의 얼굴엔 그저 낯섦만이 가득했다. 저의를 캐물으려 한 발자국을 떼어 소녀에게 다가서면 바닥에 가라앉았던 먼지가 감히 솟아올라서, 사내의 기분을 더욱 나락으로 이끌고 간다. 황금 갑주에 들러붙는 먼지를 보며 소녀는 면구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조금 더럽죠? 그, 청소 안 한지가 꽤 되어서.”
“…….”
“그런데 누구세요?”
그 불경에 당장이라도 보창, 보검을 꺼내 소녀를 꿰뚫지 않은 것은 아주 단순한 변덕이었다. 정말 아무 것도 모른다는 듯 바라봐오는 눈빛도 어느 정도 기여했다고는 할 수 있을 테지만 사내는 그저 짧게 혀를 찰 뿐이었다.
2.
영령. 성배 전쟁. 그리고 마력이니 마술사니 하는 이야기는 소녀에게 있어 너무나도 낯선 것이었다. 언제부터인가 계절이 결여된 세계에서는 그에서 비롯한 온갖 질병들이 산재했고, 또 그로 인해 수많은 생명이 스러져갔다. 소녀도 그런 생명들 중 하나가 될 예정이었으므로 그런 시간의 흐름 사이에서 도태된 지식들에 대해서는 무지한 것이 오히려 당연하다고 사내는 판단했다. 제가 감히 불러낸 것이 누군지도 모른다고 차갑게 쏘아주려던 것을 물렀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또한, 친히 제 스스로를 영웅왕이라 밝힌 순간 환한 얼굴로 “그럼, 왕님이라고 부르면 되겠네요!” 말하고 웃어버리던 맑은 목소리 때문이기도 했다.
“…….”
웃는 얼굴의 소녀는 곧 박수라도 칠 것만 같았다. 사내는 어쩐지 당혹스러움에 휩싸인 채 그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다시 한 번 왕님, 불러오는 목소리가 다정했다.
3.
부족한 것은 많지만 충만한 것은 없는 세계였다. 시한부를 선고 받았으므로.
사내는 이 세상에 남은 것이 겨울 뿐이라는 이야기에 헛웃음을 내뱉고 말았다. 다른 것은 없느냐고 다시금 물었지만 소녀는 제가 태어나기도 한참 전에 이미 봄과 여름, 가을은 자취를 감추었다는, 방금과 같은 대답을 반복한다. 벽난로에서 타오르는 모닥불만을 유일한 동반자 삼아 살아왔다는 이야기는 털어놓은 적 없지만 얼어붙은 사위를 지켜보던 사내가 그 사실을 깨닫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모든 것이 엉망이다. 성배가 남아 있을리 없는데도 영령이 현계했고 덕분에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이 고작인 소녀에게 얽매이고 말았다. 회색빛 하늘에서는 몇날 며칠 지치지도 않고 함박눈이 쏟아졌으며 사내의 시대에선 너무나 당연했던 것들이 이제는 당연하지 않은 것으로 변모해 있었다.
온전함이라고는 느껴지질 않는 이질적인 땅에서 사내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처구니 없는 일에 휘말리고 말았다. 허나 그나마 단 하나의 위안으로서 찾아낸 것은, 제가 꺼내는 그 어떤 이야기에도 눈빛을 빛내며 귀담아 듣는 순진한 호감이었다. 그래서, 저 바깥에 만연한 순백색보다는 고동빛 눈동자 쪽에 자꾸만 시선이 가는 것이라고, 사내는 조용히 생각했다.
4.
이 시공간에선 제약되는 것이 너무나 많다. 물론 사내는 영령이었고 그래서 본래 추위 같은 것엔 개의치 않는다. 하지만 사내를 이 세계에 붙잡아 두고 있는 소녀의 마력이 고갈 직전이었기에 차마 멀리까지 나가볼 순 없었다. 지금 이렇게 함께 있는데도 불확실한 연결에 어떤 악영향을 끼칠지 모르기에. 그리고 또한 그런 사실─영령의 본질 같은, 아주 기본적인 것들─에 익숙하지 않은 소녀가 한사코 바깥에 나가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에, 그는 무료한 일상을 곱씹으며 벽난로 곁에서 소녀와 함께 머무를 수 밖엔 없었다.
소녀는 사사로운 이야기를 아주 좋아했다. 여러가지 의미로 제 곁에 묶인 사내에게 지금까지의 제 삶에 대해 털어놓는 것도 좋아했고 사내가 살아 생전, 혹은 영령이 되어서 보았던 세계에 듣는 것도 좋아했다. 물론 후자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날이 많았다. 스무 해 하고도 몇 년에 지나지 않는 삶에는 마땅히 자랑스레 말할 것도, 간혹 겪었던 재미있는 경험담도 며칠 정도 떠들고 나면 동이 나는 것이었기에. 그래서 사내는 아주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깨어 있다가도 툭하면 잠에 들기 일쑤인 소녀가 언제나 황급히 일어나, 제가 잠들기 전에 해주었던 이야기를 이어달라고 졸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방금 깊은 잠에서 깨어난 소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늘 조급하게 눈을 뜨자마자 제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 빙그레 웃던 것도 오늘은 보이지 않는다.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켜 다가서면 고동빛 눈동자가 침잠하고, 내리깐 속눈썹으로부터 드리워진 옅은 그림자가 일조하는 어둠을 바라보며 사내는 다음 말을 기다리기로 했다.
“꿈을 꿨어요.”
소녀는 어떤 꿈이었는지 말하지 않아도 분명 알고 있을 것이라고 믿었고, 사내는 결코 그 믿음을 배신하지 않는다. 침묵이 그 대답으로써 두 사람을 휘감았다. 소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먼 옛날. 모든 계절이 살아 숨쉬던 시대.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햇살 아래에서 번창했던 사내의 나라를 소녀는 보았을 것이다. 비정상적이고 비합리적으로 현계한 사내였지만 서번트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고 소녀는 명목상이라고는 하지만 그의 마스터라는 지위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얼기설기 이어진 패스를 통해 소녀는 사내의 시대를 엿보다 모호한 상실감과 함께 깨어났을 터다.
사내는 알고 있다. 동경하는 것과 경험하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어설픈 상상만으로 갈피를 잡아가던 세상이 제 기대보다도 훨씬 따듯하고, 생명히 흘러넘친다는 것은 비수가 되고 만다. 한 번도 손에 쥐어본 적 없고 다시는 손에 쥘 수도 없는 따스함이 함박눈 사이에서 차갑게 식어내렸다.
“꿈인데도 따듯하더라구요.”
“…….”
“모든 게 다.”
“…….”
“저희는 이제 아주 긴 겨울잠에 들게 될 텐데.”
몰랐으면 좋았을까요. 소녀가 묻는다. 사내는 조용히 손을 뻗어 눈물이 아롱지는 것을 거두어냈을 뿐이었다.
5.
“와아…….”
소녀의 입술 사이로 뽀얀 숨결과 감탄이 터져나왔다. 사내는, 사내가 쥐어준 망원경을 통해 먼 세상을 구경하는 그 순진한 옆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쉬이 끝나지 않을 감상인 듯 보였다. 얼어붙어버린 마을 바깥으로는 나가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었다 하니 응당한 반응이기는 했다. 그러다, 내다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수평선 너머를 시야에 담아보려는 노력이 제법 가상해 비식 웃으면 이리저리 기웃대던 고개가 어느 순간 빙그르 돌아 저를 올려다 본다. 종말을 목전에 두고서도 말간 눈매가 곱게 휘어졌다.
“있죠. 저 이렇게 멀리까지 나와보는 건 처음이에요. 그러니까, 여기가 태평양인가?”
“인도양이다. 몇 번을 일러주느냐? 아둔한 녀석.”
“…으음, 음. 사람이 까먹을 수도 있죠!”
맹랑한 목소리가 쩡하니 얼어버린 바다 위로 울려퍼졌다. 사내는 불손한 빛을 품은 눈동자를 마주하며 기껏 제 보물고에서 보온을 위한 모든 재보를 꺼냈던 것을 후회했다. 제 과거를 엿보았던 것이 소녀의 삶에 독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해 하해와 같은 아량으로 더 먼 세계를 보여주려 했건만 소녀는 의외로 금방 잊어넘기고, 또 망각하는 성정이었다. 이런 세상에서라면 소녀에게 나쁠 것 없는 무딤이겠지만 제아무리 영웅왕이어도, 조그만 아쉬움 하나가 남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소녀는 망원경을 내려두었다. 숨을 고르는 듯 다시 하얀 숨결이 허공을 가른다.
“실은요. 저, 파도 친다는 게 뭔지 보고 싶었거든요. 지금처럼 얼어붙은 파도 말구.”
“…….”
“그러니까 다음엔 왕님이 바다를 방문했을 때의 꿈을 꿀래요.”
그리고 소녀는 추위 따위엔 거리낄 것 없다는 듯 사내가 내놓은 맨손을 곧장 끌어당겨 안았다. 눈 깜박할 사이였다. 불경이라 호되게 꾸짖을까 했지만 벙어리 장갑 너머에서 전해져 오는 온기가 따스해, 사내는 꾸짖음도 물리고 지금껏 후회했던 것마저 철회하기로 했다. 아주 짧은 순간 그 따스함에 현혹되기라도 한 건지 모른다. 설핏 피어오른 봄이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안일한 망상 속에서 소녀가 웃고 있었다.
6.
“사실 조금 쑥쓰러운 얘긴데.”
“……?”
“왕님이 제게 찾아온 봄이 아닐까요?”
어느 날엔가 소녀가 그런 말을 꺼내와, 사내는 소녀가 끓여온 홍차를 그만 입술 밖으로 내뱉을 뻔 했지만 태연스러운 얼굴로 참아내었다. 후유증으로 괜시리 큼큼대며 목을 가다듬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제가 들킨 것은 아니었으니 상관없다.
작은 파란을 몰고온 주제에 느긋한 소녀는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정된 마음과 함께 사내는 무슨 가당치도 않은 소리를 하느냐고 그 옆 얼굴에 쏘아붙이고자 했지만 목 끝까지 차올랐던 싸늘한 문장은 그만 다시 입 안에서 바스러지고 만다. 열어둔 창문 틈으로 파고든 공기가 차가워서였을까. 아니면 돌아보는 얼굴이 또 웃고 있어서였을까.
“저는 봄을 몰라요.”
“…….”
“그래도 만약 봄이라는 계절이 있었다면, 왕님을 닮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사내는 어금니를 사려물었다.
7.
멸망에 가까워져 가는 세계. 그리고, 그런 별과 함께 사그라드는 목숨을 지켜낼 방도 따윈 모른다. 그것을 절감하게 된 것은 소녀가 이틀 정도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던 날이었다. 늘 지지부진한 소녀의 마력이지만 그날따라 미약하게 가라앉아 살아 있음 조차 불분명했던 날. 사내는 처음으로 누군가의 맥을 짚어보았고, 그제서야 소녀가 아직은 이 세상에 발을 디디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틀 후 소녀는 깨어났다. 실낱 같은 숨으로. 그녀는 상냥하게 여며진 이불과 꼭 잠긴 창문을 보며 웃어버리고 말았지만 사내는 도무지 웃을 수가 없었다.
8.
성배가 이 시대에도 현존했다면 네 놈은 무엇을 빌었겠느냐. 이제는 의미가 없는 초침 소리만이 울려퍼지는 방 안. 묘한 정적을 가른 사내의 물음에 소녀는 나직이 대답한다. 살고 싶어요. 아마 그런 소원이지 않을까요?
9.
그리고 어느 날, 세계는 부서져 내렸다.
그것은 모두가 모호하다 여길만한 표현이었지만 그보다 이 세계의 일변을 형용해낼 만한 단어는 없었다. 말 그대로 세계는 부서져 내렸다. 아니,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것은 말을 잃고, 소리를 내는 법을 잊었다. 자연에서 온 것이라면 모두, 그리고 인위적으로 이 세계에 발을 디딘 것들 마저도 제가 내는 소음을 틀어막았다. 탄생 이래 단 한 번도 느긋한 침묵과 고요를 즐긴 적 없던 지구는 느닷없이 찾아온 적막에 한순간 몸을 떨었다. 그 순간부터 하늘조각이 마치 눈송이처럼 지상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이제껏 많은 눈송이가 그래왔듯.
소녀는 직감했다. 이 세계는 안녕을 고했으며 더 이상 해가 떠오르는 일도, 달이 지는 일도 없을 것이라고.
10.
아무런 음악 없이 그저 두 사람은 춤을 추었다. 부서져 내리는 밤을 즈려밟으며, 몇 번이고 별조각을 부서뜨리며, 뒤틀린 은하수를 노닐었다. 모든 것이 빛을 잃어가는 밤 유일하게 스스로를 밝히는 황금의 왕은 제가 손을 놓으면 너무나도 쉬이 지상으로 추락할 소녀를 끌어안고서 하늘을 가로질렀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발자취와 옷자락의 궤적이 함께 너울거렸다. 거센 바람은 머리칼을 흩뜨려놓고 차가운 공기는 손가락 끝부터 얼어붙게 만들고 있었지만 괘념치 않았다.
천천히 형체를 잃어가는 세계가 발치에 있다. 그곳에서 시작된 삶이었으니 응당 그곳에서 삶을 끝내야 했을 터였다. 허나 그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아니, 사내가 허락치 않았다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소녀가 처음으로 살고 싶다 이야기했을 때부터.
어떤 별의 소실은 멈추는 일 없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살아감을 택한 범백의 소녀에게는 여전히 불가해한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뜻 용감과 무모의 경계선에 선 것처럼 보이는 소녀는 의지할 것이라곤 그 팔 밖엔 없는 허공에서도 차분한 얼굴이었다.
“처음 춘다고 말한 것 치고는 제법 태가 나는구나.”
매서운 바람 사이로 다정한 음색이 속삭였다. 소녀는 마주잡은 손을 다시금 확인하듯 붙잡으며 옅게 웃는다. 그건, 왕님이 능숙하게 이끌어주고 계신 덕이겠죠. 그 말 그대로 춤에 관한 것이라곤 어떤 것도 알지 못하는 소녀를 품에 안고서도 여유로움을 잃지 않는 왕은 그 대답에 비식였다가 이내 당연하단 얼굴로 대답해왔다. 물론. 짐의 인도에도 따라오지 못할 계집이었다면 진즉 손을 놔버렸을 게다. 가슴 한 켠이 서늘해지는 답이었으나 이미 그런 것엔 질릴 만큼 익숙해진 소녀는 그저 웃었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새하얀 조각들이 날카롭게 비산하는 까만 밤 사이. 편린을 가로지르며 황금빛 범선이 항해를 시작했다. 어떤 별의 소실을 등진 채로. 조용히, 평화롭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