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달리스 x 네임리스 드림주
스타크래프트 시리즈
다르
0.
핵융합은 항성을 빛나게 하며 또한 수소폭탄을 폭발시킨다.
두 개의 원자핵이 모여 하나의 무거운 원자핵을 형성하는, 어찌 보면 무척이나 간단한 이 반응은 행성 안과 밖의 수많은 발전소에 무한한 동력을 공급한다. 허나 그것은 수소폭탄에도 에너지의 원천을 제공한다.
핵자와 원자핵과 강한 핵력이 부리는 이 마법 같은 현상은 불(火)과 석탄과 전기 이후 새로운 에너지원의 시대를 이끄는 기반이 된다. 허나 그것은 동시에 수소폭탄의 원동력으로도 작용한다.
그것은 생명을 보듬어줌과 동시에, 생명을 앗아간다.
1.
우주 표준시 06시 30분. 하루 일과를 시작하며 지상의 관제소에 통신을 연결했다. 스테이션 알파, 과학 팀 A. 임무 365일째. 늘 그랬듯, 나는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을 조목조목 읊어나갔고 늘 그랬듯,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임무를 중단하고 복귀하라는 명도, 혹은 강행하라는 명도 받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받을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이라고는 매일 아침 현 상황에 대한 브리핑을 되풀이하며 지구에 교신을 시도하는 것과, 미션 엔지니어라는 직함에 걸맞게 스테이션의 인공 중력 발생장치와 핵융합 발전기, 자기장 보호막을 점검하고 또 점검하는 것뿐이었다. 의미없는 말놀음과 의미없는 숫자놀음의 연속이었다.
우리는, 나와 K는 이 궤도상의 요새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 모든 갈등을, 모든 과오를. 모든 때늦은 참회와 무의미한 속죄를. 한 때 인류가 이룬 가장 위대한 성과로 치부되었던, 국가와 민족의 벽을 뛰어넘은 세계 최고의 지성들이 연합해 기어이 하늘에 띄워올린 사상 최초의 반영구적 우주 정착지에서.
오, 저 하늘 위에서 모든 이들을 굽어보는 위대한 과학의 첨탑이여. 문명이 남긴 최후의 유산이여. 한 때 지구의 소년과 소녀들은 우리의 기계 보금자리(mechanical haven)를 우러러보며 원대한 미래를 공상했고, 손에 청사진과 커피를 든 지상의 과학자들은 우리의 궤도를 계산하며 언젠가 별과 별 사이를 자유로이 누비게 될 그들의 후손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모든 것이 공허한 연기가 되어 사라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2.
내가 지구로부터 마지막 교신을 받았던 것은 임무 시작 60일 후였다. 방공호는 지옥이었고, 인간의 탈을 쓴 악마들이 동족의 육신을 산 채로 먹어치우고 있었다. 지상은 황폐화되었으며, 이 전쟁에 관여했든 하지 않았든 세상의 모든 정부는 붕괴했다. 통신 장치 너머의 목소리는, 간곡한 어투로, 살아남으란 말을 몇 번씩이나 되풀이했다. 우리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바치는 기도라도 되는 듯, 조곤조곤하고 나지막한 어조였다. 살아남아 다오, 살아남아 다오, 부디. 스테이션의 위치가 통신 가능 범위를 벗어날 때까지 그 읊조림은 계속되었다. 살아남아라, 살아남아라, 살아남아라.
그리고는, 정적.
이따금씩 잡히곤 했던 만국 공통 채널의 홀로비전 전파도, 때론 무덤덤하게 때론 격정적으로 전쟁의 경과를 보고하던 라디오 파장도, 며칠 뒤에는 모두 사라졌다.
우리는 아마도, 문명 최후의 생존자들이었다.
3.
그리고, 임무 365일 째. 이제 내게 들리는 것이라곤 K의 음성이 전부였다.
브리핑을 마친 뒤 지상의 통신기지에 -만일 지금까지 통신기지가 남아 있다면- 보낼 레포트를 작성하던 나는, 잠시 홀로그램 모니터에서 시선을 돌려 내 왼손 약지에 끼워진 사파이어 반지를 바라보았다. 지금쯤이면 함선 컴퓨터를 두드리고 있거나, 수경재배 온실에서 정원일을 하고 있을 K의 왼손 넷째 손가락에도 같은 보석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었다. 나의 K. 나의 동반자, 나의 동료.
이 기록에서 굳이 그의 이름이나 출신 가문을 세세히 밝힐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단지- 그, 이니셜 K는 무척이나 평탄한 길을 걸어온 이였다는 서술로 대신하겠다. 순조롭게 사관학교를 -준최우등으로- 졸업하고, 순조롭게 비행사 시험을 통과하고, 순조롭게 이 프로젝트에 자원하여, 아주 순조롭게 이 하늘에 오를 첫 번째 이주민으로 선발되었다. 군에서 주요 보직을 맡고 있다는 그의 가장 친한 친구가 미리 손을 써 주었던 덕분일지, 아니면 순전히 그의 우월한 능력 때문이었을지. 그를 모르는 이들은 대부분 전자라 믿었다. 그를 익히 아는 이들은 당연히 후자라 주장했다.
첫 번째 이유라면, 그는 제 목숨을 살려 준 그 이름 모를 친우에게 퍽이나 고마워해야 할 터였다. 두 번째 이유라면, 그는 특정한 개인 대신 제 손과 머리를 향해 무한한 감사를 표하였을 것이었다. 어찌되었던 간에, 그와 내가 극악무도한 경쟁률을 뚫고 수많은 사람들을 제치며 이 세상에서 단 두 명에게만 허락된 ‘우주 정착지 실험 선발대’라는 보직을 기어이 얻어내었단 것은 그 자체로 운명의 일환이었다. 운이란 것은, 철저히 인간의 관점으로 본 개념이다. 나는 사건의 동시성 뒤에 숨겨진, 운명이라는 이름의 더 큰 설계를 본다.
내가 고마움을 느끼는 상대는 운명이었다. 운명은 우리를 만나게 하였고, 하늘에 오르기 위한 긴 준비 기간 동안 우리를 기다렸고, 결국엔 우리를 하나로 묶어놓았다.
4.
K는 언젠가, 이 모든 것이 우리 -인류- 가 저질렀던 원죄에 대한 신들의 보복이라며 농담처럼 말했었다. 그는 막 환복을 마치고 선실의 수면 캡슐로 들어가려 하던 참이었고, 나는 무중력 공간을 위해 특별 제작된 진공 튜브 속에 든, 끔찍하게도 맛없는 유동식을 한창 물에 불리고 있던 중이었다.
허나 신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왜 우리는 살아남고 저들은 살아남지 못했던 것일까.
내가 이리 묻자, K는 그의 짙푸른 눈동자를 반짝이며 침통한 어조로 답했다. 물론, 우리의 신들께서는 끔찍하게 유머러스한 분들이기 때문이지.
보라, 어리석은 피조물들아. 너희들 문명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상징이 저 곳에서 너희의 지옥을 굽어보고 있다. 그런데도 자만심에 눈이 먼 너희들은 제 손으로 멸망을 재촉하는구나.
우리가 이곳에 다다른 뒤 60일 후 전쟁이 시작되었고, 그것은 단 몇 시간만에 종결되었다. 고향 행성의 하늘에 수십 개의 버섯구름이 피어오르는 광경을 망원창으로 말없이 바라보던 K는 조용히 한 마디를 던졌다- '지상의 멍청이들이 거대한 불꽃놀이 쇼를 벌이고 있다'고. 유치하기 짝이 없는 K의 표현에 나는 기운 없는 실소를 지어보였을 뿐이었다. 그래, 그의 말마따나 신들은 -만일 그들이 존재한다면- 끔찍이도 유머러스한 존재들이었다.
5.
K가 선체 외부에 생긴 미세한 구멍 -우주 쓰레기 중 하나와 우연찮게 궤도가 일치했던 것이 분명했다- 을 확인하기 위해 몇 시간의 EVA를 실행하는 동안, 나는 인공중력 구역 한 켠에 자리한 트레이닝 룸으로 향해 오늘 치의 근육 운동을 했다. 각자의 임무를 마친 우리는 사령실로 복귀해, 간단한 저녁을 먹었다. 스테이션에 남아 있던 몇 줌 안 되는 씨앗으로 수경재배한 상추를, 닭가슴살 통조림과 함께 오리엔탈 드레싱에 버무려 만든 샐러드였다.
내가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우리 둘 몫의 커피를 내리는 동안, K는 반중력 의자에 걸터앉아 T S 엘리엇의 시집을 읽었다.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지구를 떠날 때 챙겨온 종이책 중 하나였다. 남아 있는 통조림이 얼마 없다고 그에게 말해줄까 헀지만, 다음을 기약하고 그만두었다. 아직 시간은 많다. 우리에게 단 한 가지 미치도록 풍족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당연히 시간이었다. 연정도, 희망도, 절망도 아닌, 시간.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낳고,
추억과 욕망을 뒤섞으며,
봄비로 잠든 뿌리를 휘젓는다.
K의 목소리가 텅 빈 선실을 지나 소름끼칠 듯 새하얀 복도에 울려퍼졌다. 저 아래에 문명의 잔재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지구에 시간과 계절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지적 존재가 남아 있다면, 그들은 오늘을 사월의 열세 번째 날이라 불렀을 것이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우리는 하늘로 과학을 쏘아올렸지만, 한 순간의 성과에 자만했던 나머지 스스로의 손으로 파멸했다. 우리의 후손들은 별과 별 사이를 자유로이 누빌 수 없을 것이다. 아니, 그들은 이 행성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형체 없는 죽음과 절망 속에서, 선조들이 저지른 잘못의 대가를 어깨에 짊어진 채 하루하루를 보내야 할 것이다.
사람의 아들아, 너는 말하기는커녕 짐작도 못하리라
네가 아는 것은 파괴된 우상더미뿐
그 곳엔 해가 쪼아대고 죽은 나무에는 쉼터도 없고
귀뚜라미도 위안을 주지 않고
메마른 돌엔 물소리도 없느니라.
그들은 우리를 저주할 것이다. ‘우리’라는 집단을 이루었던 모든 개인들을. 수많은 화가들과 소설가들, 시인들이 홀로비전들과 전자책들 속에서 노래하던 지구의 풍경을, 단 한 번의 핵전쟁으로 그들의 손에서 앗아간 것이 다름 아닌 우리 세대였으니 말이다.
6.
침묵을 유지하던 K는 내게 다가와, 내 어깨에 팔을 두른 뒤 키스했다. 우리는 잠시, 얼굴을 맞대고 서 있었다. 노후한 통신 위성이 연료 탱크랑 부딪혔나 봐. K는 말했다. 마치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라는 듯.
- 파편들 말야, 우리 쪽으로 오고 있어. 오늘 건 극히 일부였고. 메인 컴퓨터로 궤적을 계산해 봤는데, 전부 충돌 경로야.
- 남은 시간은?
- 많아봤자 이틀.
그리고 또 다시, 침묵. 엄습해오는 불안감 속에서 우리는 최대한 말을 아꼈다.
-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보자. 여길 버려야 한다는 상황을- 그게 우리 보호막을 뚫고 실질적인 피해를 입힐 정도로 커다랗고, 우리에게 궤도 이탈 매누버를 위한 연료 따윈 남아있지 않다고. 스테이션 구명정, 아직도 작동해?
- 응. 지구 귀환용으로 설계된 거라, 그 자그마한 게 우리 집이 될 수는 없겠지만. 우리가 그대로 지구에 내리든, 방향을 돌려 우주를 떠돌든, 결국엔 끝이야, 여길 벗어나면.
- 끝이구나. 이 지긋지긋한 것도.
- 응, 끝.
응, 그렇구나. 불안은 허탈함으로 치환되었다. 서로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지금은 나도 그도 모두 지쳐 있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 세상은 이렇게 끝나는구나.
높은 하늘 위에서 문명의 종말을 두 눈으로 맞이한 두 명의 방관자들- 우리는, 울면서 웃었다. 마치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라는 듯.
∞.
세상은 이렇게 끝나는구나
세상은 이렇게 끝나는구나
세상은 이렇게 끝나는구나
쾅 소리가 아닌 훌쩍임과 함께.
- T. S. 엘리엇, <텅 빈 사람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