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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브리엘x시토우 이데리하

언라이트 

​레이브리엘 

  제법 길이를 가진 무언가를 품에 끌어안고 이마를 댄 채 고개를 꾸벅거리며 조는 일을 취침으로 칭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을까. 하지만 이데리하에게는 충분히 휴식이고 수면이었다. 그는 그렇게 되도록 갈려졌고 길들여졌다. 세계를 구하는 군대에서. 때로 그에 의지하는 것은 라이플이었고 아직 검의 형태를 유지하는 일반적인 셉터였다. 그가 창에 처음 몸을 기대고 잠든 것은 그의 숨이 끊어지기 약 3년 전의 일이다. 등을 기대지 않은 채 고른 숨을 쉬어야 하는 이유는 다른 데에 있지 않다. 자신이나 주변인의 목숨을 온존하기 위함이다. 기실 이 세계로 추락한 이데리하에게는 이제 없어도 그렇게 상관은 없을 습관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가 떨어진 지구에는 이데리하 혼자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단 둘 뿐이라는 것이 더더욱 유감이었다.

  괴수의 살갗을 파내듯 뚫은 창을 이데리하는 팔에 힘을 주어 잡아 뺐다. 부정형의 젤리 같은 물질이 사람의 형상을 이루는 괴수였다. 그는 이 괴물을 잘 알고 있다. 몇 시간 전에는 숱한 촉수 가닥가닥에 한 가지도 남김없이 독기 어린 칼날을 단 듯한 괴수를 녹여서 죽였다. 새까만 불꽃처럼 전신이 일렁이는 그림자 생물이나, 봉긋한 젖가슴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차림을 한 채 그를 유혹하고 그 새빨간 피를 취하려 드는 흡혈 요녀들도 만났다. 이데리하의 26년 인생에서 그를 구성하는 미립자 대부분을 강탈해간 놈들이었다. 그리고 이제 부활한 그의 삶마저 저당 잡으려고 날카로운 손톱을 세웠다. 그것들을, 이데리하는 아침에 일어나 얼굴을 씻어내듯이 죽였다. 살과 뼈가 미세한 가루로 소리죽여 뭉개지고 허공으로 흩어지는 것을 이데리하는 심상하게 응시했다. 이번의 상대 역시 그랬다. 마귀를 베어 넘기기 무섭게 숲 곳곳에 도사렸던 살기들이 그의 발끝을 감돌던 물줄기와 움직임을 같이 해 사그라들었다. 창 끝에 묻은 점액 같은 것을 장갑 낀 손으로 문질러 닦으며 그는 잘게 한숨 쉬었다. 며칠을 쉬지 않고 걸어도 길을 잃어 방랑하는 사람 하나 제대로 마주하지 못했다. 그래도 사람 살던 곳이었다는 점을 시사하는 양 텅 빈 마을이나 폐가가 드문드문 보였으나 누군가 있느냐고 목소리를 내기 무섭게 그늘이 드리운 구석이나 뒤쪽에서 마물이 송곳니를 드러내었다.

하루이틀간은 꽤 담담하게 여겼다. 기형으로 망그러진 세계에서 살다 죽었으니 다시 그 대지로 되돌아가는 일이 두렵지는 않았다. 그러나 차츰 흐르는 시간들은 무수한 칼날 이빨이 되어 이데리하의 감정과 육신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그의 영혼에게 음습하게 속삭이었다. 내 기억에 남아있는 지구가 맞는 걸까? 만일 그렇다면 여기는 대체 어디쯤일까? 그는 수십 번의 살해를 겪었고 그보다 더 많은 삭제를 행한 사람이다. 마음을 쪼개고 창 끝으로 저며 눌러 죽인 끝에야 비로소 행하게 되는 일들. 행할 만용을 억지로나마 갖게 되는 것들. 적응이라 함은 형체도 남기지 않고 가루가 된다는 것과 동의어다. 포말이 되어버린 마음이 바람에 쉬이 반죽당하고 흐트러진다. 이데리하는 그 모든 것들을 길가의 돌멩이와 모래먼지들에게 하듯 가만히 내버려두었다. 불안해하지도 않는다.

그것을 그의 뒤에서 지켜보는 레이브리엘이, 모를 리 없었다. 설령 이데리하 자신은 모를지언정. 그녀는 그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 일들을 여러 번 목격한 아이였다. 그렇기에 부러 이 세계로 흘러들어올 것을 결의했다. 물론 그건 이데리하가 몰라도 하등 상관없는 일이다. 그녀도 그것을 부러 입 밖에 내며 생색내지 않았다.

“…기척이 사라졌다.”

“아까 이 근처에서 물 소리를 들었어요. 오늘 밤은 거기서 쉬어요.”

“…알었어. 니, 많이 피곤해뵈니께.”

 

주어가 한참 잘못된 것 같은데. 레이브리엘은 속으로만 그리 생각했다. 그녀는 침묵을 지키며 이데리하의 소맷부리를 적신, 새까맣게 변색된 핏자국을 보았다.

곧 그들의 야영지는 작은 호수에 자리잡았다. 주변의 수풀과 나무의 잎사귀가 흐린 바람에 흔들리며 기분 나쁘게 울었다. 레이브리엘이 모닥불 가까이로 다가와 셔츠로 둥글게 받친 열매를 내밀었다. 살짝 터진 열매에서 과즙이 흘러나와 앞섶을 적셨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데리하가 그 사이 구워두었던 생선을 꼬챙이에 꿰어 그녀에게 내민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아웃도어 요리로 써먹을 동물들이 드문드문 있었다. 레이브리엘은 그 꼬챙이를 못본 체 하며 신발을 벗는다.

“왜 안 먹냐.”

“이데리하 먹어요. 어차피 인형인데 안 먹어도 상관없는걸.”

“내가 니 몸 상태도 까맣게 모르구 있다구 생각했다믄 오산이여. 잔말말구 얼른 먹어라.”

옷 벗지 말구. 이데리하가 중얼거리며 레이브리엘의 팔을 살짝 잡아 끌어당겼다. 장갑 한 겹 너머로도 그녀의 말랑한 살갗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성유계에서 어느 순간 닿았던 팔의 감촉이 생각났다. 그러나 그 때와는 다르다. 그녀는 이제 36.5도의 체온을 갖추고 피부 밑에 흰 뼈와 붉은 피가 존재하는 인간이었다. 전사들만이 기억을 찾아가며 생전의 모습을 갖추는 것이 아니었다. 인형이 자신에 대해 잘 아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이데리하는 생각했다. 이제 그녀는 인형이 아니라 소녀로 불려야 합당할 것이다.

“배고프잖어.”

“그래도 싫어요.”

“뭐땜시로.”

“……말이에요.”

레이브리엘은 말투가 조곤조곤한 아이였지만, 청자가 다시 말해달라는 부탁을 할만치 목소리가 기어들어가는 수줍음 많은 소녀는 아니었다. 뭐라구 한겨. 이데리하가 그녀에게로 몸을 가까이 하면서 귀를 기울였지만 그녀는 되레 한 발짝 물러난다. 곧내 그녀는 수풀 속으로 줄행랑을 놓았다. 지시자! 그녀의 ‘전직’을 부르는 이데리하의 목소리가 울렸지만, 이윽고 고개를 빼끔하니 내민 레이브리엘의 목과 어깨가 죄 우윳빛인 것을 보고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있는 자신을 허락할 수 없는 소녀의 마음이다. 입 밖으로 내는 것조차도 민망한 일이었기에, 이데리하는 그것을 모른다.

이데리하는 체념하고 모닥불을 등지고 앉아 나머지 꿰인 생선 하나를 뜯었다. 등 뒤에서 찰박이며 물장구를 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러려니 하고 냅두었다. 그는 그것을 소녀의 유년을 지키는 일환이라 생각했으므로. 레이브리엘이 언제나 애어른처럼 행동하지는 않았지만 이데리하는 그녀가 어린아이 특유의 순수한 작태를 취하는 것을 조금 기특하게 여겼다. 그것에 일일이 따라줄 수는 없을지언정 조금은 마음이 평온해졌다. 그는 그 바닥도 까닭도 없는 평온함이 아주 사실은 그의 산산이 조각난 유년에서 기인했다는 것도 잘 모르고 있다. 그런 그를 진실되고 온전하게 치유해줄 수 있는 가장 단촐하고 확실한 답을, 레이브리엘은 알았다.

“…안 외로워요?”

물에 젖은 손바닥으로 살갗을 문지르며 레이브리엘이 물었다. 이데리하는 대답이 없다.

“리즈도 디노도 없어요.”

“…….”

“이데리하 옆에 있는 사람, 나 혼자 뿐이잖아요.”

“…너무 오래 있으믄 감기 걸린디야. 적당히 씻었으믄 나와서 밥 묵어.”

그런 말을 지금도 하는군요.

정말 당신이 택한 이 세계에 만족할 리 없는데도.

화제를 다른 방향으로 꺾는 이데리하의 뒷모습을 레이브리엘은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지상에 부활한 전사들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이데리하를 따라 성유계에서 자취를 감출 무렵 소녀는 성녀의 힘을 얻었다. 전사들이 발을 새로이 딛는 세계는 전사들의 무의식이 지향하는 곳임을 깨달았다. 누군가는 한창 제국과 왕국의 전쟁통에 원수로서 군림했고 누군가는 단지 어깨를 가장 잦게 마주댄 친구와 함께 길을 걷고 같은 여관방에서 카드게임을 하며 달을 하늘 저편으로 전송할 수 있는 시간축을 골랐다. 그랬기에 이데리하가 낙하한 세계의 정체를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손가락을 비트는 기계 같은 곳. 철의 여인 같은 세계.

“너라두 있응께.”

그러니까, 그런 대답을 하면 반칙 같은 건데.

하긴 이 둔한 사람이 그런 걸 알 턱이 없겠지.

레이브리엘은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사랑으로 해석해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녀는 주제넘은 공상에 투신하는 것을 오래 전에 포기했다. 그런 식의 감정 자살 자체에 선을 그으려고 무던히도 애를 써왔다. 그 행동에 잇따라 죽는 감정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을 잘 알기에. 설령 그리 해석이 가능해도 해피엔딩으로 맺음되는 페어리 테일은 아니다. 자신에게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나 맞을 수 있는 엔딩들이 이데리하에게 주어지지 못했으니까. 그 탓에 성유계로 흘러들어왔겠지. 그럼에도 첫 번째의 굵은 기억이 그의 영혼밖에 없는 형상에 유입되었을 때 어렴풋하게 감지했던 따뜻하고 말캉한 덩어리같은 것이 뾰죽한 형상으로 빚어지는 소리가, 현계에서 울려퍼지는 소리로 레이브리엘의 고막을 가느다랗게 찢었다. 그녀는 그런 소음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이데리하는 진짜 바보예요.”

그럼에도 소녀는 물 속에 몸을 가두어넣고 귀를 틀어막았다. 꼴사납게도 그런 식으로밖에 맞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다만 디 아이 공략전 때의 레지멘트들이, 엔지니어들이 그랬듯 치밀하게 계획을 짜기로 했다. 이데리하가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자신의 신체를 녹일 마음을 잡았다. 에취, 재채기를 해서 이데리하가 그녀의 몸을 제 후드를 벗어 급하게 건져 올릴 때까지 그녀는 시뮬레이션을 몇십 몇백번을 했다. 이데리하가 원래 있어야 할 곳을 떠올리는 시뮬레이션.

괜찮아, 레이니 베놈을 맞는 기분일지도 몰라. 나쁘지 않을 거야.

이데리하도 피 냄새 장난 아니게 나요. 이리 들어와요. 소녀가 청년의 옷자락을 힘껏 잡아당겼다. 아침에 부닥칠 진실을 감추며 짓궂게 입꼬리만 말아 올려 미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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