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브라x은
페어리테일
-오잉
“다음 주 식량 구하러 가는 당번이 누구였지? 슬슬 가야할 것 같은데.”
식량창고를 둘러보던 맥베스가 벽에 그어진 날짜를 보며 그들이 모여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미 의미 없어진 월과 일을 임의로 만들어 벽에 새겨 넣는 것은 미래를 향한 발악일 수도 있고 단순히 하루하루를 살아가기 위한 수단에 불과할 수도 있었다. 맥베스는 그 허술한 달력을 수단으로써 사용하고 있었다. 맥베스의 시선이 향했던 소라노는 그의 시선이 느껴지자 어깨를 으쓱이며 검지로 바닥위에 불룩 튀어나온 검은 이불을 가리켰다. 너덜너덜한 이불 속에 가만히 몸을 처박고 있던 은이 주섬주섬 고개를 내밀었다.
“아, 에릭이랑 나다.”
“너희 둘은….”
“뭐냐, 그 못미덥다는 눈초리는.”
이불 바로 옆, 벽에 등을 기대고 있던 에릭이 맥베스의 미적지근한 시선에 얼굴을 찌푸렸다.
“또 연애질하느라 늦게 올까봐 그렇지.”
“여, 연애질이라니!”
소라노가 맥베스 대신 말을 전하며 비아냥거렸다. 만면에 웃음을 가득 안고서 손끝으로 입을 가리고 큭큭 웃는 것이 여간 얄미운 것이 아니다. 은이 발끈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슨 말이라도 해보라는 생각으로 제 옆의 에릭을 돌아봤건만, 정작 에릭의 표정은 평안한지라 도리어 은만 요상한 표정이 되었다. 뒤로 리처드가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 틀린 말도 아니구만. 가자.”
“에리익!”
에릭은 은의 머리를 꾹 누르며 헝클였다. 잘 개어진 겉옷을 챙겨 위로 통하는 사다리 앞에 서 열 받은 얼굴로 저를 따라오는 은의 어깨를 잡아 또 다른 겉옷을 입혔다. 언제 챙긴 건지 장갑이며 모자며. 말랐던 몸이 옷으로 탱탱 불어 오르고 나서야 에릭이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고 그를 놓아주었다. 대체 뭐냐는 불평을 뱉어내려던 그는 저쪽에서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는 동료들을 흘겨보다 이마를 짚곤 잠자코 사다리에 올랐다. 말해봤자 제 입만 아플 걸. 이미 나갈 때마다 겪었던 일이었다. 괜히 열 내지 말자.
한참 차가운 사다리를 오르고 나면, 지상으로 통하는 출구가 있었다. 지하는 햇빛이 들지 않고, 눈도 들어오지 않았다. 깊이 뚫어놓은 지하. 익숙해지는 데는 꽤 시간이 걸렸으나, 바깥에서 다른 것들처럼 꼼짝없이 얼어 죽는 것 보다야 나았다.
바깥으로 나오면 이제는 멎은 눈보라에 언제나 안도의 숨을 내쉰다. 지하에서 가지고 있는 식량으로 버티기를 얼마나. 간혹 몰아치는 눈보라에도 오기를 부리며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자들이 몇 명인지 셀 수 없었다. 이 때 빨리 둘러보고 오지 않으면. 출구에서 빠져나온 은이 에릭에게 손을 내밀자 에릭은 손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다 헛웃음을 뱉곤 그를 지나쳐 올라왔다.
“하여간 삐뚤어져선.”
“너나 잘 챙기시지, 추위도 잘 타는 게.”
건물 안에 출구가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 바깥이었으면 눈에 덮여 지하에 갇히는 꼴이 되었을 거다. 그럼 굶어 죽든가, 살해당해 죽든가. 뭐, 그랬겠지. 여러모로 이 사태에 비해 저들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그러니 아직까지 살아있겠지. 신에게 감사할 일인지, 아니면 그 때 그 때 상황을 타개하고 나아간 우리들이 장한 것인지. 그런 것들을 생각하는 건 그만두기로 했다. 당장 살기에도 급급한 상황이고, 이 재앙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은 어쩐지 암암리에 금기시 되고 있었기에.
건물 바깥으로 나와 깊게 쌓인 눈을 푹푹 밟아가며 앞으로 나아갔다. 짧고 굵은 빙하기가 지나간 뒤로 눈이 녹기 시작하고 있었다. 살아갈 희망이 점점 생겨났다. 은은 눈을 감고 제 옆의 에릭을 자꾸만 확인했다. 은근한 시선을 애써 무시해가더니, 이내 은의 손을 다잡았다. 은이 흠칫 몸을 떨었다.
“뭘 그렇게 봐.”
“어디 갈까봐 그렇지.”
“나 없으면 너 얼어 죽을 거 뻔히 아는데 내가 퍽이나 어딜 가겠다.”
은의 얼굴에 확 열이 돋았다. 애꿎은 제 손에 힘을 꽉 쥐었다.
“그 정도는 아니거든?! 참 나, 에릭은 말도 예쁘게 못하고, 행동도 안 예쁘고 누가 데려가나 몰라.”
“말은 바로하지? 내가 널 데려가는 거지.”
은의 손이 팍, 빠져나갔다. 그래, 소라노가 연애질이라고 했던 이유를 좀 알 것 같기도 했다. 이건 순전히 전부 제 옆의 에릭 탓이었다. 이 재앙 이전에는 저를 놀리는 것 밖에 못하더니. 역시 사람은 좀 큰 일이 일어나봐야 한다곤 하던데. 죽을 위기 몇 번 거치니 사람이 이렇게 바뀔지 누가 알았던가. 에릭이 다시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잡아왔다. 이쯤이면 좀 소름이 돋을 정도지. 은은 굳이 다시 제 손을 빼진 않았다.
“너무 노골적으로 튕기진 말라고.”
“너 진짜 낯간지러워 진 거 아냐.”
“뭐가?”
“으, 말을 말자.”
에릭이 초조한 것은 사실이었다. 이 전 눈보라 속에서 그를 잃을 뻔한 뒤로. 어딜 가긴 누가 어딜 가. 갑자기 사라질까봐 불안한 것은 에릭이었다. 결국 해프닝으로 끝나버렸지만 그 때의 그 감정은 아직도 떠올릴 때면 손이 떨려왔다. 내 옆에서 계속 있을 줄 알았던 사람이. 눈앞에서. 에릭은 잠깐 눈을 감았다 뜨고 깍지를 꼈다. 이 재앙 속에서 살아있는 이유가 그였는데. 너마저 잃어버리면 더 이상 무엇을 보고 살아야 할지, 그것에 의미가 있는지. 그 날로 깨달았다. 이 추위 속에서도 네가 옆에 있으면 뭐든 견딜 수 있다. 다만, 네가 없다면 나는 그 어떤 것도 견딜 수 없다. 결국 우리는 이런 상황이 돼서야 서로를 아끼는 법을 알게 되었구나. 은은 그런 것을 생각하며 잿빛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래, 네가 있으니 아직까지 살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