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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노세 글렌X유키미 요루

종말의 세라프

​-카세야나 

*원작 3년 전 시점

 

 

 

  세계가 무너지던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

 

  아주 언젠가, TV 프로그램에서 게스트들에게 던졌던 질문은 세계가 멸망하기 전의 것이다. 흘러나오는 목소리 위로 햇빛이 더웠고, 바깥에서 우는 매미 소리를 들으면서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다. 만약에 말이죠. 톤 높은 음성이 한 번 짧게 끊어졌다가 이어지는 과정을 가만히 보고 있다. 세계가 멸망한다면 여러분이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건 뭔가요?

  어느 철학자는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나는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고 했지만, 사실 그건 요루에게 있어서 어떻게 되든 좋은 일이었다. 애초 현실감이 없다. 당장 내일 세계가 멸망한다 해도 적어도 오늘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늘 눈앞의 풍경만 보고 살아온 요루에게 있어서 세계의 멸망이란 갑자기 찾아올 장마보다 문제조차 되지 않는 그림에 불과하다.

 

  인간에게 종말이 온다면, 역시 모두 꽁꽁 얼어붙는 게 아닐까. 사실 잘 모르겠어. 어느 책에서 봤던 공룡들의 최후는 추위 속에서 얼어가는 모습이었기에, 어린아이의 상상력으로는 좀 더 그럴 듯한 문장을 만들어내기란 고작 이게 한계였다. 당신은 어떻게 멸망할 거 같아요? 그렇게 물으면 대화 사이에 약간의 공백이 생겼다. 베란다를 등지고 있었기 때문에, 마주본 얼굴에는 그림자가 머무르고 있다. 등 뒤로 익어가는 노을빛이 선명해서… …, 문득, 아주 문득 세계가 불에 타서 멸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심 없는데.

  공룡들처럼 꽁꽁 얼어붙는 건 어때요?

  애냐.

  애잖아.

 

 

  차라리 그러면 낫겠지. 덧붙이듯 희미하게 흘러나온 음성이 한숨처럼 흩어진다. 겨울이었다면 분명 하얗게 녹아내리는 색이었겠지만, 여름이기 때문에 대신 금색에 가까운 주황빛이 그림자에 먹혔다. 뭐가 낫다는 건지, 왜 차라리라는 건지. 그 때 물어봤었다면 조금은 좋았을까. 어차피 글렌은 말해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TV 프로그램에서 MC가 세계 멸망을 언급할 때 무슨 생각을 했을지, 그 얼굴에 어떤 표정이 떠올라있었을지, 이제 와 생각하면… ….

   조금 죽고 싶어졌다.

세계가 멸망한다면의 가정이, 사실은 머지않은 미래라는 걸 알고 있던 당신에게 하고 싶던 것이란 남아있었을까.

 

 

 

 

* * *

 

 

   

    … …아.

  시야가 흐렸다가 선명해지기를 반복하는 게, 꼭 초점이 맞지 않은 카메라 렌즈를 한 겹 덧씌워놓은 기분이 든다. 오래 전 휴대폰이 처음 생겼을 때 카메라 초점이 맞지 않아 몇 번 터치하며 바라본 풍경과 흡사했다. 팔과 이어진 관을 따라 떨어지는 링거액이 똑똑 소리를 내는 걸 잠깐 가만히 지켜본다. 이거, 나 아홉 살 때 언니가 하고 있던 건데. 별로 달갑지 않은 기억이지만. 그대로 상체만 일으키려 하면 오른쪽 어깨부터 왼쪽 허리부근까지가 조금 뻐근했다.

  왜 이런 곳에 있는지 의문을 가질 정도로 판단력이 없진 않다. 적어도 유키미 요루는 14살의 어린 나이에도 상황 판단력이 우수한 편에 속했다. 그런데도 그 상황에서 흡혈귀와 대치했단 말이지. 그렇다면 그건 좋은 판단이었을까, 나쁜 판단이었을까. 스스로의 목숨과 타인의 목숨을 저울질하자면 끝도 없다. 어쨌든 이렇게 살아있다. 손끝으로 왼쪽 가슴께를 가볍게 누르면 그 아래로 심장 소리가 번졌다. 두근두근, 하고. 살아있다는 건 이렇게 간단히 확인할 수 있다. 죽은 것도 마찬가지지만.

  오래 전의 꿈을 꿨다. 만약 자신이 죽었다면 이건 아마 꿈이 아니라 주마등에서 그쳤을 것이다. 오래 전이라 해도 5년 전이다. 세계가 멸망하기 전의 이야기. 그리고 세계가 멸망했을 때의 이야기. 세계가 멸망한 후에도 이야기가 써질 수 있다는 자체가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지. 발치로 세계가 부서지던 풍경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걸을 때마다 죽음의 냄새가 달라붙고, 이따금씩 사람의 손이 밟히던 상냥하지 않은 세계에서 유키미 요루는 아직 살아있었다. 그리고 ‘아직도’ 살아있다.

  “… ….”

 

  워낙 정신이 없던 탓에 이불 끝에 실리는 무게를 눈치 채지 못했는데, 지금 보니 오른편에 신야가 있었다.

본인 앉은키보다 낮은 침대에 엎드린 불편한 자세인 채로 상체가 천천히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다. 신야 씨. 그렇게 나오려던 음성을 다시 목 아래로 삼킨다. 간호해주신 거구나. 지금이 몇 시 인지는 모르지만 창밖이 어두운 걸 보면 적어도 이른 시간은 아니다. 부상을 입었던 건 오후쯤이었으니 수술에든 회복에든 들어간 시간을 고려해도 적어도 하루는 지났다는 이야기가 된다. 고작 몇 시간으로 끝날 부상이 아니었다는 것쯤은 다친 본인이 잘 알았다.

  줄곧 오른손을 감싸고 있던 온기가 신야의 것인 걸 알자마자 복잡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오래 전 봤던 드라마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손을 잡은 채로 간절하게, 귓가에 매달리던 음성. 죽지 말아줘. 그렇게.

 

  죽진 않았지만, 죽을 수도 있었다. 때맞춰 글렌 부대가 온 건 달리 운이 좋아서라고 밖에 설명이 불가능하다. 자고 있는데도 손을 감싸고 있는 힘은 꽤 강해서 요루는 빼내려던 걸 쉽게 포기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신야의 얼굴은 요루가 기억하는 것보다 더 피곤해보였다. 사실 언제 신야가 피곤한지, 피곤하지 않은지 분간하는 건 아직도 어렵다. 웬만한 감정들을 웃음으로 지우고 있다는 것 정도야 눈치 채고 있다.

 

 

“…어.”

 

 

 

  그러니까, 그 밖의 표정이 떠오르는 순간이 온다면 두말 할 것도 없는 진심이라는 얘기다.

 

  바로 앞에서 마주친 눈동자는 채도 높은 푸른색이었다. 손을 넣고 휘저으면 한기가 타오를 것만 같은 감각. 눈이 마주쳤다, 라고 인지하기도 전에 신야의 얼굴은 뭐라고 형용하기에도 어려운 표정이 되어서, 마주쳤다는 간단한 사실조차도 잊어버렸다. 그럴 정도의 얼굴이었다. 요루는 신야가 이런 표정을 한 걸 처음 봤다. 물론 만나기 전에 신야가 이런 표정을 한 적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적어도 평소 신야의 얼굴에 떠오르는 것들이란 이런 게 아니었다. 좀 더…, 가볍고, 읽기 어려우면서, 그럼에도 손끝으로 더듬으면 진심이라는 게 비칠비칠 묻어나왔다.

  그런데 지금 신야의 표정은 꼭, 손끝만 갖다 대도 부서질 것 마냥 금이 간 것처럼 보였다.

 

  신야 씨. 좀 전까지 아래로 내려 보냈던 단어를 다시 끌어올린다. 신야는 웃고 있지 않았다. 웃는 것 이외의 표정도 많이 봤지만 이런 표정은 아마 처음이라고 생각한다. 형용할 수 없는 수많은 것들이 얼굴 위를 스쳐지나갔다. 일그러짐과 그 위에 희미하게 떠오른 안도감, 의식적으로 꾹 감았다 뜨는 눈꺼풀, 문장들을 와르르 쏟아내기 직전의 입모양, 같은 것들.

  요루쨩. 그렇게 간신히 토해낸 음성이 조각조각 발밑에서 부서진다. 꼭 세계가 발치서 쌓이던 소리 같아.

 

 

“걱정, 했어.”

 

 

  오른쪽 어깨부터 왼쪽 허리까지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중상. 이제와 떠올리자면 14살 아이의 머리로는 조금 현실감이 떨어지는 이야기다. 대답하기도 전에 끌어안아져서 그 이상 신야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네가 죽는 줄 알았어. 덧붙여진 문장은 소리가 작았지만, 끌어안아진 상태에서는 선명하게 들린다. 요루는 대답하는 대신 조금 망설인 끝에 신야를 마주 안았다. 그러면 손바닥에 온기가 번져서… …, 새삼 이게 살아있는 거구나, 하고.

 

 

  “…죄송해요.”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그렇게 작게 덧붙였다. 조금 뭉개진 음성이었지만 아마 이 거리에선 들렸을 거라고 생각한다.

 

  대답은 없었다. 대신 더 세게 끌어안아졌다.

* * *

 

 

 

  그 뒤로는 정신이 없었다는 것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한참을 그렇게 있으면 사유리와 시구레가 들어왔다. 정신없이 울면서 달려드는 사유리에게 신야는 순순히 자리를 비켜줬고, 그제야 조금 지친 웃음이 얼굴에 머물렀다. 시구레는 울진 않았지만 운 직후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조금 뒤에 들어온 미토는 코가 새빨갰다. 고시는 걱정했다면서 드물게 웃음기 없는 표정으로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단지 요루는 뭐라고 해도 닿지 않을 것만 같아서 같은 문장만 반복했을 뿐이다. 죄송해요… …,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사실 너 죄송하다고도 생각 안 하지. 혼자 남겨진 병실이라고 말하기엔 한 사람이 더 있어서 그 표현은 무산됐다. 혼날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실제로 혼나고 있었다. 요루는 일부러 시선을 회피했다. 긍정의 의미다. 굳이 숨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죄송하다고 생각은 하고 있어요.”

  “…그건 어떤 의미인데?”

  “걱정을 끼친 거.”

  “그걸 말하는 게 아니잖아.”

 

 

  글렌의 음성은 원래도 낮아서 곧잘 온도가 없는 것처럼 들리지만 실제로 화나면 더 무섭다. 아마 보지 않아도 마찬가지일 얼굴을 굳이 눈에 담고 싶진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혼나는 건 싫다.

  이상하게 아까 글렌만 없다 했는데, 모두가 쉬라고 나간 사이에 들어온 건 글렌이었다. 유키미 요루. 한참의 침묵 뒤에 꺼내진 다섯 글자는 그렇게 들렸다.

 

 

  “죽을 수도 있었다고.”

 

 

  죽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지. 귀주장비의 회복력만 없었더라도 진작 흙 아래서 썩어갔을 몸이다. 칼날이 몸을 파고들던 감각과 베어지던 고통을 희미하게나마 기억하고 있다. 눈앞이 붉었고 순식간에 시야가 아래로 추락하는 과정은 느리게 흘러갔다. 그게 죽기 직전의 감각이라고 한다면, 죽었어도 이상하진 않았을 테다. 애초 이 세계는 죽음이 당연해진 세계였다. 누가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세계. 세계의 멸망은 죽음의 당연함을 가져다줬다.

  나라고 해서 죽는 게 좋을 리는 없잖아요. 뭐? 굳이 다시 말하진 않는다. 요루는 손을 한 번 쥐었다가 꾹 폈다.

 

 

  “…있잖아요.”

  “뭐야.”

 

 

  전에 내가 물어본 거 기억해요? 그게 뭔데. 본인이 생각해도 뜬금없는 화제다. 요루는 깨어나기 직전의 꿈을 상기했다. 아주 오래 전의 이야기. 세계가 멸망하기 전의 이야기.

  내일 세계가 멸망한다면… ….

 

 

  “전에…, TV에서 세계가 멸망한다면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게 뭐냐고 물었을 때.”

  “… ….”

  “그 때 내가 어떻게 멸망할 거 같냐고 물었던 거.”

 

 

  이제와 그 질문은 의미가 없다. 이미 지금 세계는 발치로 모조리 부서져 내린 후였다. 생자들은 잔해들을 밟아나가면서 목숨을 이어나갔다. 그 아래에는 누군가의 싸늘하게 식은 목숨도 있었을 것이다. 글렌은 문장이 끝났음에도 대답 없이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문장 뒤에 찍힌 온점이 문장을 이어갈 무언가라도 되는 것 마냥.

 

 

  “그 때 당신은…, 무슨 생각을 했어요?”

 

 

  전부 다 알고 있던 당신은 무슨 생각을 했어? 노을빛을 등진 채의 얼굴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사실 그 표정의 의미는 뭐였는지. 차라리 그랬으면 낫겠지, 라고 말하던 문장이 사실 어떤 의미였는지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어느 새 이불을 그러쥐고 있는 손은 핏기가 없었다. 조금 괴로운 심정이 되어버린다. 아니, 아주 많이… …. 부상을 입었을 때 죽는 건가, 라고 느꼈다면 이제는 죽고 싶어졌다.

  아무 생각도 안했어. 거짓말. 요루는 왜 도리어 자신이 울고 싶어지는지 몰랐다. 분명 혼나고 있던 건 이쪽이었는데 오히려 변명하고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건 글렌 쪽이다. 그래도 글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은 하고 싶은 말이 많을 것이다. 그런 걸 네가 왜 물어보냐고 무시해도 좋을 질문이었다. 그래도 단지 가만히. 가만히.

 

 

  “진짜야.”

  “… ….”

  “아니, 그런데 갑자기 그 얘기는 왜 꺼내는 건데. 옛날 꿈이라도 꿨어?”

 

 

  정말 그 꿈을 꾸지 않았더라면 묻지 않았을 것이다. 5년 전 일이다. 까마득한 오래 전 일을, 그것도 한순간이었던 걸 여태 기억하고 있는 게 신기한 거다. 그러고 보면 글렌은 기억하고 있다는 것처럼 반응을 했다. 정말 기억이 난 건지, 배려해주려 그런 척을 하는 건지. 거기까지 생각한 요루는 이불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어느 쪽이든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쨌든 무지(無知)는 죄였다.

  차라리 묻지 않았다던가, 내가 진작 알고 있었다던가. 차라리 그랬다면. 제로에 수렴하는 가능성의 문제다. 노을을 등지고 있던 글렌의 표정이 자꾸 떠올라서 불현듯 울고 싶어졌다.

 

  이런 세계가 될 거라고, 바이러스로 세계가 멸망할 수도 있다고 답해주기에 이치노세 글렌은 너무 상냥했다.

 

 

  “그러면 세계가 멸망한다면,”

 

 

  거기서 잠시 숨을 멈춘다. 올라오려던 문장이 목에 걸려서 기침이 나올 것만 같았다. 콜록, 하고. 그러면 무언가 와르르 바닥으로 쏟아져 내릴 것이다. 수 없이 많은 감정들과 갈 곳을 잃어버린 언어들. 방황하는 내 음성.

  “가장, 하고 싶던 건 뭐였어요?”

 

 

  문득 완전히 정신을 잃기 전을 떠올리면 음성이 들린다. 그게 누구인지까지는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괜찮았다. 급박하게 뛰는 몸에 비해 정작 끌어안겨진 안쪽은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어서…, 아마 이대로도 괜찮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귓가에 하릴없이 달라붙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마저 눈을 감았다. 대답도 했다고 생각은 하지만, 아마 입 밖으로 나오진 않았을 것이다.

  대답이 곧바로 들려오지 않은 탓에 공백이 생겼다. 거기에 무언가 한 글자 한 글자 새겨 넣고 싶은 충동을 억누른다. 공백의 다른 이름은 기다림이었다. 한순간 고개를 들어 본 글렌의 얼굴은 아까와는 조금 달랐다.

 

  화를 낸다기 보단…, 그건 꼭… ….

 

 

  “지금이랑, 똑같아.”

 

 

  희미하게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완전히 지워지기 직전, 그 형태에 가까운 흔적. 미약함.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제발. 그 두 글자가 어찌나 간절하게 들리던지. 하릴 없이 고막 안쪽에 달라붙던 음성.

 

  공백을 채운 문장은 딱 거기서 멈췄다. 요루도 거기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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